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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0ech0
Echo in Eco
호기심이란 무지의 고백인데, 그것은 의도적이며 당당함과 동시에 열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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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우리는 알아야 했다. 빌어먹을 인스타그램은 생의 낭비다. SNS는 생각의 ‘단초’를 얻는 편리한 도구일 뿐이지 생각의 ‘확장’을 가져다주진 않는다. 대게는 예술이 그런 역할을 도맡아 한다. 어쨌든 우리는 단서를 얻었다면 거기서부터 진짜 정보를 찾기 위한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각 예술가이자 문화 이론가로 국내외 미술 현장에서 꾸준한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 코디 최 Cody Choi(b.1961)는 그의 한 저서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지식은 질적으로 검증된 정보일 뿐이며, 그 정보 자체를 권력의 일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지식인이 될 수 없다. 검증된 정보인 지식의 ‘목적’은 ‘이해’를 도모하고 ‘수준 있는 지혜’를 얻는 데 있으므로, 지혜는 반드시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인스타그램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지론이다. 그러므로 본 계정 또한 아주 가볍게 운영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일의 시작, 또는 사건이나 일이 일어나게 된 동기.’ 그 말인즉슨 생각의 ‘단초’를 이곳에 꾸준히 심을 것이다. 글을 읽고 작은 호기심이 생긴다면 그 답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줬으면 부탁한다. 관련 책을 읽어도 좋고, 미술관에 가도 좋고, 당장 떠오르는 생각을 마구 적어봐도 좋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거리로 나가, 당신의 믿음을 위해 부단히 싸울 수 있길 바란다. 일련의 과정이 우리의 소통방식이 될 것이라 굳게 믿으며 글을 마친다. 구조적인 시스템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이 기상악화 속에서 어떻게 헤엄쳐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돌아오게 된 명확한 동기이자 앞으로 전개될 Ec0ech0의 단출한 방향성이다.

무엇도 지나치게 멋질 수 없었으며 미의 추구에는 끝이 없었다.

완충된 에어팟의 초록불이 깜빡인다. 마치 건너야 할 것만 같은 초록불의 신호등 같이. 길만 건너면 된다. 이 수동적 반복과정을 반복한다. 꺼내고 꽂으면 끝이다. 하지만 무식한 스피커는 불편하다. 하나의 곡을 듣기 위해서 스피커, 앰프, RCA 케이블, 스피커 케이블, 그리고 여러 소스기기(CD플레이어, 턴테이블, 네트워크 플레이어)로 점철된 그것은 나를 난처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불편함은 인류가 잃어버린 원초적 즐거움이다. 경험이란건 굉장히 총체적이고 공감각적이다. 분절없이 감각하는 경험을 느끼고 싶다면 주머니 속 에어팟을 그대로 넣어두자. 에어팟은 우리 귀에 직접 음파를 밀어 넣어 반사음이 없다. 반면 스피커는 음파가 당신이 서 있는 공간의 벽을 치고, 천장을 치고, 바닥을 친 후 당신의 고막에서 진동한다. 그리고 그 진동은 금새 당신의 내면 어딘가로 도달할 것이다. 모든 선택에서 깨끗함과 선명함을 내어주고 몰입을 얻어내자. 결국, 우리와 함께하는 건 시공간에서 얻는 한 줌의 감정이니까.

설거지 도중 솟구친 무아지경(無我之境)에 관하여. 무아지경이란 없을 무(無), 나 아(我). 즉, ‘자아’가 없어지는 경지다. 모든 정신이 한 곳으로 통일되어 무아지경의 세계로 미끄러져 자신의 실존마저 잊는 초월적이고도 환각적인 순간이다. 설거지를 하면서 보려고 태블릿으로 뭘 틀어놓을 때가 있는데, 설거지가 끝나고 나면 태블릿 혼자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때때로 알게 된다. 사실상 ‘무아지경’이 되는 셈이다. 시간이 멈춘 듯 세상이 고요해지고 무의식의 상태로 들어선다. 마치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특이점에 도달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튼 설거지를 하다 졸지에 나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무대에 올라섰다. 일상의 몰입을 감각하는 일은 이렇게나 위대하다.

우리는 자연의 맹위를 통제함으로써 안심을 얻는 동시에 도시 생활의 뻔한 반복에 질려서 바다로 나갔다가 갑자기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고, 색갈이 선명한 생물들이 바위 그늘에서 출현하는 것에 놀람으로써 삶의 빛을 회복하기도 한다. 도시 생활과 해변 생활을 왔다 갔다 하는 거지. 뭐 둘 중에 하나란건 없는 것 같다.

나는 늘 철학자였고, 늘 예술가였다. 십 대엔 시를 주로 썼고, 그림도 그렸다. 이십 대엔 작곡과 작사를 많이 했다. 서른 중반에는 단편 영화 주인공으로 선발되어 영화에 출연하였다. 박사 학위 후 사진에 전념하고 있다. 철학자와 예술가, 이 두 모습을 통제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철학과 예술은 겉으로 두 개의 산 봉우리처럼 솟아 있지만, 실은 하나의 산맥으로 만난다. 그 만나는 지점을 연구해서 논문으로 쓸지, 아니면, 그냥 서로 다른 봉우리에서 번갈아 가며 자유롭게 노닐지 고민하곤 한다. 왜 많은 장르 중 사진으로 왔을까. 아마도 사진이 종합 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을 잘 하려면, 몸에 음악이 흘러야 하고, 펜에서 시가 나와야 하고, 연극 배우처럼 ’특정한 관점‘에 완전히 빠져 들어야 한다. 쌍성계가 언젠가 소멸하듯, 내 정신 속에서 철학과 예술의 상호 작용도 그럴 것이다. 소멸하면서 어떤 흔적을 남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제대로 돌아버리자. Word by @neo2.0.2.1

우리의 가장 큰 모험이 모험의 부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앨범커버 아래의 조그마한 별표(즐겨찾기)를 쉴 새 없이 누른다. 큰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좋아해서 미치겠는 노래들도 아니다. 그저 지금 이곳에서 이 노래를 듣는 나와 이 세상을 스크린 샷 하고 싶은 것이다. 그냥 그렇게 스치듯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잠시라도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다. 이 3차원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이 특정 노래가 주는 이 감정을 언젠가는 다시 한번 꺼내먹고 싶은, 한여름의 더위 사냥 같은 것이다. 흘러가는 것을 붙잡고 싶다는 내 마음속 자그마한 욕망의 표출, 즐겨찾기. 카메라가 없을 때 나는 별표를 누르곤 한다.

자연이 좋아 자연에 집을 지었다. 내 집을 위해 자연의 희생은 필연적이었다. 나는 행복하다 내 사방에는 풀들과 나무, 생명들이 가득하니까. 과연 나무는 그럴까? 나의 웃음과 나무의 울음 결국 저멀리 퍼지는건 웃음소리 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것을 나는 지키고 있는가 혹은 나도 모르는사이 베어버렸는가 꿈과 현실 나는 웃어야할까 울어야할까.

애플뮤직으로 노래를 듣다 보면 간혹 가사가 안 올라오는 곡들이 있다. 답답함은 잠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그저 몸을 맡기니 입가에 미소가 점점 번지기 시작한다. 가사의 단어들을 하나하나 읊조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느껴라. 외국 노래의 가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함에도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던 과거의 우리처럼. 이 스탠스는 음악뿐만이 아닌 삶의 영역에서 또한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어떠한 쾌락은 일시적일 뿐 아니라 치명적일 정도로 파괴적이며 착취적이다. Imagem: Jean Jullien

완벽하지 않은 우리 인간이 쫓아가는 완벽은 종종 <미완성>이라고 불립니다. 완벽에 가능한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한 인간이 쏟은 고민과 땀방울을 더욱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단어. 미완성. 이에 동요한다면 회화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예술에서 마지막 점을 찍는것이 조금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완벽을 향한 집착은 오히려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에 오늘도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유영하기를 바라요. 모든 예술은 순수한 영혼으로 부터 출항을 시작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