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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hwarok
<대화록>
고추장 양념에 무와 함께 졸여진 고등어 대가리의 살을 발라냈다. 하얀 밥그릇에 담긴 흰쌀밥이 붉게 물들고, 젓가락 끝에 달라붙은 양파가 말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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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선 위 선을 이룬 나무들 아래> 문밖에선 혼메가 흩날리는 갈퀴 속의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문 안쪽에선 살로메와 스탕이 앙상한 몸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들을 떠난 사이 자란 키 탓에 그들의 몸은 더욱 작게 느껴졌다. 그들은 지쳐 보였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내가 저 문밖으로 나가면 저 작은 몸들조차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남아 이들과 함께 사는 것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결국 난 저 문밖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게 저 문밖을 나서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곳에 살로메와 스탕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내가 돌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건넬 수 있는 마지막 말을 겨우 골라냈다.
. <능선 위 선을 이룬 나무들 아래> 당신의 말대로 그들은 처참했습니다. 그르치키는 동굴에서, 츠푸라케는 숲의 땅굴에서, 하티카와 쿠자보투는 위르토 족의 노예가 되어, 토리츠네는 위르토 족의 사냥놀이 장난감으로, 파지우비와 소치우레는 위르토족의 저잣거리에서 구걸하며 그리고 하치마르는 위르토 족의 망나니가 되어 목숨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웃음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부족을 배신한 이들이라며 위르토족에게조차 손가락질당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그들의 처지가 그날 배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것보단 나아 보였습니다. 살아 있다는 건 그런 것이었습니다. 동굴이나 땅굴에서 살 것을 결정할 수 있고, 노예나 장난감이 되고, 구걸을 하거나 망나니짓을 하면서라도 살아가겠다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 말입니다. 그 선택이 비록 비열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선택에 대한 결과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게라도 살아 있는, 그래서 자신의 앞날을 선택할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은 제게 그 어떤 죽음보다도 고결해 보였습니다. 그 고결함 때문에 저는 그들을 벨 때마다 망설였습니다. 처참한 그들의 얼굴 속, 삶에 대한 책임감만은 여전히 두터워서 두려움마저 느꼈습니다. 그날 이후 3년간 당신이 내게 지겹도록 반복했던 말, 부족 모두를 배에 모아 다 같이 끝내자고 결정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도망친 8인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그 말, 그 말이 저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지 않았다면 전 그들을 죽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목에서 피가 솟구치면서도 이 모든 일을 주도한 건 당신이라고 털어놓았던 하치마르를 가장 먼저 만났다면, 전 당신이 3년간 내게 촘촘히 새겨 넣은 복수심을 조금도 빠짐없이 가지고 당신을 향해 달려왔을 겁니다. 부족 사람 중 삶으로부터 무책임한 도피를 선택한 건 오직 당신 한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46명이 선택할 기회마저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오만으로 빼앗아 버렸습니다. 저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지금껏 살아왔습니까. 산다는 것이 당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달콤한 것이어서, 부족을 등졌음에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 <능선 위 선을 이룬 나무들 아래> 이제 땅이 되어버린 바다는 밝은색의 얇은 진흙을 덮고 있었다. 진흙 위로는 빛 잃은 갈대들이 무리 지어 조용히 흔들렸고, 바람이 낮게 깔려 불 때면 동쪽 산으로부터 날려 온 국화 향이 갈대들 사이를 휘감았다. 어둠은 저 멀리 떨어지고 있는 해를 집어삼키며 서서히 세상을 감쌌고, 나는 혼메 위에 앉아 스탕이 나타날 방향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시간을 견뎠다.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 위 선을 이룬 나무들의 형태가 아직은 낮의 여운 아래 선명했다. 스탕은 어둠이 완전히 자리 잡고 난 후에야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혼메는 긴 목을 숙여 진흙맡에 코를 대고는 킁킁거릴 뿐이었다. 시간은 더 흘러야 했고, 나는 혼메의 허리에 매 놓은 보라색 보따리에서 칼을 꺼내 날을 점검했다. 오늘이면 그 쓰임을 다 할 칼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날카로워야 했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살갗을 뚫어 경동맥을 베어내는 찰나의 순간으로 10년의 세월을 끊어내야 하기에. 나는 칼날 위로 흘러내렸던 8명의 피를 떠올렸고, 칼에서 나는 것인지, 기억 속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쇳내를 맡으며 보따리에 칼을 다시 집어넣었다.
. 이 글을 쓰게 된 건 며칠 전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저는 현재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10년을 보냈고. 재작년에 다시 부산으로 오게 됐습니다. 고향이지만 오랜 시간 떠나있었기에 나름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한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적응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친구들과는 늘 쓸데없는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함께 운동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함께 쌓은 시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존재하기에 저에겐 늘 든든한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총선을 앞두고 그 친구 중 몇몇과 정말 오랜만에 정치 얘기를 하게 됐습니다. 그 와중에 세월호 얘기가 등장했고, 정치와 사회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고 자신을 평한 친구 몇몇이 제게 묻더군요. 근데 그 사람들은 왜 아직도 시위하고 그러는 거냐. 도대체 뭘 바라는 거냐. 내가 그 부모라면 힘들어서라도 그 이야기를 그만 하고, 그만 듣고 싶을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화가 났고, 쏟아내고 싶은 많은 말이 있었지만, 또 화를 내고 싶지 않기도 해서, 저의 친구들이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 입을 닫고 정확한 대답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저의 친구들이 제게 한 질문과 같은 것들을 묻는 사람을 한 번쯤은 다들 만나보셨을 겁니다. 실제로 만나보지 못했다면 TV를 통해 보셨을 거고, 인터넷 뉴스를 통해 읽으셨을 거고, 차에서 흘러나온 라디오를 통해 들으셨을 거고, 휙휙 넘기던 유튜브 쇼츠에서 보셨을 겁니다. 도대체 뭘 원하느냐. 아직도 왜 그러고 있냐. 지겹다. 그만해라. 지친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피곤하다. 뭐 이런 말들. 그럴 때 당신은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제가 한 대답이 정확한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게 지겹고, 지치고, 피곤하면, 그럴수록 빨리 유족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들의 울분을 가장 빨리 멈추는 방법은 하루라도 앞당겨 그날의 진실을 밝히고, 그날의 책임을 다하고, 그날의 죄를 벌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최소한 그렇게라도 해야 유족들이 그날을 받아들이고 살 수 있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제 대답이 제 친구들에게 제대로 전해졌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랬길 바라며, 기회가 있을 때 또다시 얘기하는 수밖에는 없겠죠. 이 글이 엉망진창인 걸 알면서도 끝까지 써보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글과 함께 올라갈 글은 제가 쓴 소설 <능선 위 선을 이룬 나무들 아래>입니다. 목포에서 돌아와 쓰기 시작해 2월 말경 완성했던 소설입니다. 대화록에 무언가 올리는 일이 더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요즘 다시 함께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 고민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릴 수 있어 좋습니다. <능선 위 선을 이룬 나무들 아래>는 차분하게 읽어주시고, 오늘 하루만큼은 10년의 시간 동안 한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지나친 일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4월 16일 대화록 : 최직경
. 그날로부터 1년이 흘렀던 날의 저녁, 저는 여의도 광장에 있었습니다. 광장엔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내렸지만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노란 우산을 들고, 노란 풍선을 들고, 노란 깃발을 들고, 노란 우비를 입고, 노란 기억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보며 2014년 하반기에 한 영화제에서 만났던 브라질 감독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습니다. 저는 그에게 영화가 무슨 힘이 있냐고, 현실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영화의 이미지와 상상력이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냐고, 좋은 영화는 분명 내게 많은 힘이 되지만, 치가 떨리는 현실을 마주할 때면 너무나도 영화가 미워진다고 퍼부었습니다. 잠깐 고민하던 그가 말하더군요. 영화는 힘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모여 극장 안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건 힘이 있다. 같은 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묻지 않고, 서로의 표정을 살피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공간 안에는 서로를 향한 마음이 오가고 있으며, 그 마음의 이동과 집합은 아주 강한 힘이라고 말하더군요. 제가 여의도 광장에서 그 대화를 떠올린 건 제 곁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 때문이었겠죠. 비는 함께 맞으면 그만이었고, 서로의 마음이 뭉쳐 집합을 이뤘고, 그렇게 생긴 힘이 누군가를 살렸을, 그런 날이었습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지만, 글이 매끄럽게 써지지가 않네요. 문단끼리도 잘 붙지 않고, 한 문장 한 문장 쓰는 것이 편치 못합니다. 몇 번을 다시 읽으며 쓰는 중인데 무엇이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아직은 쓸 수 없는 얘기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오늘은 끝까지 써보겠습니다. 끝까지 써서, 여기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 '너무 크다.' 지난 1월, 목포에서 인양된 세월호를 보고 처음으로 한 생각입니다. 너무 큰 배였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바닷속으로 기우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봤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 큰 배였습니다. 저렇게 큰 배가 기울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는 것이, 곳곳이 녹슬고, 부서지고, 벗겨져, 말라 있는, 세월호를 보면 볼 수록 더욱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기라도 했다면 현실을 믿고, 이해하는 것이 조금은 가능했을까요. 참사의 원인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아이를, 부모를, 친구를, 동료를 잃은 이들은 2014년 4월 16일을 받아들이기 위해 여전히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지난 10년은 어땠습니까. 저는 그랬습니다. 제대를 하고, 학교를 마치고, 취직을 하고, 연애를 하고, 친구들의 결혼을 축하하고, 그들의 아이를 보며 웃고, 대화록을 만들고, 소설을 쓰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걸었습니다. 몇 가지 적었지만, 지금 열거한 것들의 수백 배 정도 되는 또 다른 일들이 있었을 겁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 도무지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10년은 그렇게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당신의 지난 10년은 어땠습니까. 누군가의 10년이 단 하루에 머물러 있는 동안, 당신의 지난 10년은 무엇들로 채워지고, 어디를 향해 흘러갔습니까. 이렇게 여쭙는 것이 당신의 10년을 비난하기 위한 것은 아님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그저 우리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하는 마음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10년이란 시간의 부피와 무게에 대해, 그 어마어마한 부피와 무게를 단 하루로 채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 말입니다.
저는 요즘 <대화록>을 하는 동안 잠시 놓고 있었던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제가 할 수 있는 대답 중 하나겠죠.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대화록>을 읽어주신 여러분에게도 전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소설을 쓴 사람이 저라고 알아채실 수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대화록>과 저의 소설은 분명 개별적이지만, 그러나 연결될 것입니다. 인터뷰할 때면 처음 건네는 질문으로 쓰곤 했던 날씨 얘기를 하며 편지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비가 많이 왔고, 이어지는 더위가 꽤 힘겨운 이번 여름입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좋은 시간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2023.08.16 <대화록> 드림.
마지막으로 <대화록>의 진행을 마치는 까닭에 대해 말씀드리며 편지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2년 전,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를 보고 집에 와 했던 그 생각은 제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건넬 수 있는 질문이 더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인터뷰 일정이 정해지면 상대에 대한 자료를 찾고, 기존 인터뷰를 읽어보고, 그가 만든 것들을 몇 번이고 다시 돌아보며 질문지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성된 질문지를 가지고 인터뷰를 하고 돌아서면 실은 그 질문들이 모두 저를 향한 질문이었다는 걸 깨닫곤 했습니다. 그렇게 2년의 시간 동안 저를 향해 질문을 쏟아내고 나니, 이제는 대답할 때가 됐다는 결심이 섰고, 제가 앞서 적은 질문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은 어찌 보면 쌓은 질문에 대답을 하고 싶다는 말로 바꿔 적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개의 인터뷰 일정이 잡혔고, 인터뷰를 준비하며 몇 가지 기준을 세웠습니다. 기존의 다른 인터뷰에서 했던 질문은 반복하지 말 것, 껄끄러울 수 있는 질문이라도 필요하다면 꼭 시도할 것, 인터뷰를 매끄럽게 정리하지 말 것 등이었죠. 이 기준들은 <대화록>의 마지막 인터뷰까지 지키고자 했습니다. 거창한 신념이 있었다기보단, 사실 별 영향력이 없을지도 모를 <대화록>과 저와의 대화를 신뢰하며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물론 제 딴에는 예의를 갖추고자 세운 기준이 인터뷰를 함께 한 상대에겐 곤란함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배려로 <대화록>의 인터뷰는 현장에서 나눈 대화의 원본에 가까운 형태로 발행되었다는 걸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에 걸쳐 <대화록>엔 26개의 인터뷰가 모였고, 이 편지를 쓰기 전 다시 읽어보니 공통으로 언급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고향, 동네, 불안, 외로움, 생각, 변화, 과정 등이었는데, 이 단어들을 씹으며 이것들은 지난 2년간 저를 맴돌았던 화두였다고, 동시에 저를 포함한 동시대의 사람들이 완곡하게, 가끔은 느슨하게 품고 있는 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제가 뽑아낸 저 말들이 <대화록>의 인터뷰에 담긴 마음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명확하게 정리할 수 없는 훨씬 많은 마음이 질문과 답변 사이에 존재합니다. 그 마음들을 느끼길 원하시는 분은 <대화록>의 인터뷰를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대화록>의 모든 인터뷰는 당연히 개별적입니다. 그러나 연결됩니다.
기주봉 배우를 보러 갔던 날이었지만, 기주봉 배우와 관련된 기억은 주차장 구석에서 소탈하게 담배를 태우며 임대형 감독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모습이 전부입니다. 모르는 이의 사적인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고, 같이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저는 어떻게 하면 이 영화를 사람들이 더 많이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집에서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를 되새겼고, 되새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영화처럼, 제가 좋아하지만 아직 사람들이 잘 몰라서, 좀 더 알려졌으면 하는 영화가, 음악이, 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사실 그 영화를, 음악을, 글을, 찍고, 만들고, 쓰는 사람들이 작업을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건 아마 멈추지 않는 그들에게 힘을 얻어 저 또한 멈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마음이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대화록>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인터뷰 전문 웹진으로 방향을 잡았고, 친구에게 부탁해 로고를 만들었습니다. 서툰 감각이지만 로고 디자인을 바탕으로 홈페이지도 직접 제작했죠. 그 후, 인맥이랄 것도 없던 저는 닥치는 대로 인스타그램 DM을 보내고, 댓글을 남기고,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타 웹진에서 진행했었던 영화감독과 배우의 합동 인터뷰 하나만이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저의 포트폴리오였지만, 감사하게도 그 인터뷰 하나만 보고도 몇몇 분들은 인터뷰를 수락하셨습니다. (대화록 초기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께는 특별히 더 고마운 마음입니다.)
오늘을 끝으로 <대화록>은 진행을 마칩니다. 2021년 9월의 초입이었습니다. 매 주말이면 영화를 보러 가던 당시,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아리랑시네센터에서 기주봉 배우전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체 프로그램 중 일부 몇 작품의 상영 후엔 기주봉 배우가 참석하는 GV가 예정돼 있다는 정보가 포함된 소식이었습니다. 최근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통해 그를 자주 만나곤 했었는데,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예의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고, 그가 실제로 말할 때의 자세, 태도, 뉘앙스 같은 것들이 궁금해져 시간이 맞는 영화를 예매했습니다. 그렇게 예매한 영화는 <윤희에게>로 널리 알려진 임대형 감독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였고, 흑백영화라는 것, 기주봉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가 임대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정보 정도만 가지고 극장 내 상영관 의자에 앉았습니다. 영화를 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우는 일이 제겐 잘 없는 일인데, 그날은 왜 눈물이 멈추지 않았는지, 가끔 다시 그날을 더듬으며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아직은 찾지 못했습니다. 영화는 한 쇼트 한 쇼트 빠짐없이 제게 달라붙었고, 영화가 끝날 때쯤, 눈물의 이유를 찾는 걸 포기한 제게 남은 생각은 그저 이 영화를 최대한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화록>과 함께 해주신 분들께. 이어지는 게시글을 확인해주세요.